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자파힛 제국 (문단 편집) === 배경 === [[인도네시아]] 지방은 수없이 많은 열도와 군도로 이루어진 지형이었기에 중앙집권적인 국가가 일찍 등장하지 못했다. 원주민들이 살고는 있었지만 제대로 된 국가의 모습을 이루지는 못했던 것. 그나마 고대에 이미 문명을 이룩한 [[인도]] 지방의 상인들의 영향으로 점차 초기적인 국가의 기틀이 잡히기 시작했다. 시간이 더 흐르자 드디어 인도네시아 지방에도 인도인들의 영향을 크게 받아 [[힌두교]]와 [[불교]]를 신봉하는 소왕국들이 하나하나 세워지기 시작했다. 비옥한 농토와 풍요로운 기후로 인도네시아의 알짜배기 땅이나 다름없던 [[자바섬]]에도 여러 소왕국들이 솟아났다. 개중 제일 먼저 등장한 왕국은 300년대 중후반에 세워진 [[타루마 왕국]]. 초기적인 국가 형태를 이룩한 타루마 왕국은 7세기 경 약화되더니 [[순다 왕국]]과 갈루 왕국으로 갈라졌다. 하지만 순다 왕국과 갈루 왕국은 원래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나라였기에 왕들이 서로의 왕위를 겸하거나 싸우는 등 투닥거리면서 살았는데, 그 상황에서 등장한 인물이 전설적인 영웅 '산자야'였다. 산자야는 순다 왕국의 왕자로 태어나 순다 왕위를 물려받은 다음, 갈루 왕국마저도 통합한 이후 세력을 규합한 뒤 저멀리 자바 섬 중부로 이주해 [[마타람 왕국]]을 세운 업적을 남겼다. 마타람 왕국 내부에는 2개의 세력이 있었다. 당시 인도네시아인들은 [[인도]]의 영향을 받아 [[힌두교]]를 믿는 세력과 [[불교]]를 믿는 세력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개중 [[시바]]를 믿는 힌두계는 초대 국왕 산자야의 가문인 '산자야 왕가', 불교계는 '사일렌드라 왕가'[* 자바 중부의 크두 평원(Dataran Kedu)을 핵심 영지로 하여 출발한 왕가로, 기원으로는 여러 설이 있다. 마타람 왕국이나 스리위자야 왕국의 왕가가 되기도 했다. 동남아에서 가장 중요한 왕가들 중 하나로 꼽힌다. 발리섬의 와르마데와 왕가 역시 사일렌드라 왕가의 방계이다.]를 중심으로 뭉쳤다. 마타람의 개국시조 산자야가 죽고 왕위를 물려받은 파낭카란 왕은 사일렌드라 왕가 출신이었다.[* 일반적인 역사 서술은 이렇지만, 산자야도 사일렌드라 왕가에 속했으며, 산자야 왕가라는 별도의 왕가는 없고, 오직 사일렌드라 왕가의 대승불교 분파와 시바파 힌두교 분파만이 존재했다고 보는 학설도 있다.] 이후 사일렌드라 왕가는 쭉 마타람 왕위를 이어갔는데, 전성기 시절에는 자바 섬의 힘을 등에 업고 저멀리 [[말레이 반도]]의 [[스리위자야]]의 왕을 겸하며 연합 왕국을 구성해[* 당시 마타람 왕국의 왕은 사일렌드라 왕조 출신의 다라닌드라 왕이었다. 다라닌드라 왕이 어떻게 인접한 스리위자야 왕국을 집어삼켰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당시 스리위자야 왕국은 세워진지 100년 정도 된 국가였는데, 아마 원래부터 스리위자야 일대에 영향을 끼치던 사일렌드라 왕가에서 자바의 힘을 등에 업고 스리위자야 왕국의 왕위도 얻어낸 것으로 추정된다.] 찬란한 동남아 문화의 꽃을 피우기까지 했다. 그 유명한 '''[[보로부두르]]'''와 [[프람바난]] 사원 등이 지어진 것도 이 시대다.[* 8세기에서 10세기 초까지 자바에서 힌두교 및 불교 사원 건축은 전성기를 맞았는데, 이후에도 이슬람화 전까지 많은 사원이 세워졌지만 14세기 마자파힛 제국의 전성기를 제외하면 이 마타람 왕국에 비할 정도로 위풍당당하고 정교한 사원 건축을 찾기는 어렵다.] 하지만 838년 사일렌드라 왕가 출신의 사마라퉁가 왕이 사망하자 마타람-스리위자야 왕국은 바로 무너졌다. 사마라퉁가 왕은 자바 섬과 힌두교도들을 잠재우기 위해 산자야 왕가 출신의 부마 라카이 피카탄에게 왕위를 넘겨주고자 했는데, 이미 사일렌드라 왕가가 뿌리깊이 자리잡은 스리위자야 왕국 측에서 이를 반대했기 때문. 결국 사일렌드라 왕가는 스리위자야로 완전히 넘어가 자바 섬의 산자야 왕가로부터 독립을 선포했다. 자바 섬에 남은 라카이 피카탄과 그 후계자들은 힌두교를 중심으로 나름 평화를 구가하다가, 929년 [[화산]] 폭발과 스리위자야 왕국의 끝없는 침략, 역병 등을 피해 마타람 왕국의 중심지를 자바 섬 동부로 이전했다. 이 시대 이후의 자바 왕가, 즉 산자야 왕가를 '이샤나 왕가'라고 구분해 부르기도 한다. 마타람 왕국은 스리위자야 왕국과 200년 동안 투닥거리며 싸우다가[* 스리위자야 왕국을 다스리는 사일렌드라 왕조가 자바 섬을 여전히 자신의 적법한 영토라고 인식하고 있던 탓이 컸다.], 결국 스리위자야 왕국의 지원을 받은 영주 우라와리가 1016년 마타람 왕국의 수도 와투갈루를 불지르고 다르마왕사 국왕을 죽이면서 몰락했다. 이 참변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다르마왕사의 조카이자 [[발리]]의 왕자인 [[아이를랑가]][* 아이를랑가의 어머니 마헨드라다타는 발리 왕의 아내 겸 공동 통치자로 다르마왕사와 남매였다.]가 겨우겨우 마타람 왕국의 잔존 세력을 규합해 카후리판 왕국을 세웠다. 아이를랑가는 1045년 카후리판 왕국을 동쪽은 장갈라 왕국, 서쪽은 크디리 왕국으로 쪼개고 승려로 출가했다. 이후 크디리 왕국은 장갈라 왕국을 병합하고 자바 중동부를 차지한 주요 세력으로 재부상했는데, 크디리 왕국 내에서 내분이 일어나는 도중 종교계의 지원을 받은 영주 '켄 아록'이 1222년 크디리 왕국을 몰아내고 [[싱하사리 왕국]]을 세운다. 이 싱하사리 왕국의 왕가인 '라자사 왕가'가 곧 마자파힛 황가의 모태가 되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